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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이란?


    5·18민주화운동이란?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간 대한민국 광주와 전라남도 일대에서 벌어진 민주항쟁이다.




    전두환 신군부 12·12군사반란으로 실권 장악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망하자,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일부 정치군인들이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극비리에 실권을 장악했다.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쿠데타에 참여했던 군인들과 대비하여 이들을 신군부라 불렀다. 18년간 지속됐던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1980년 초 ‘서울의 봄’이 시작됐다. 대다수 국민은 빨리 헌법을 민주적으로 바꿔 민주주의를 앞당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발맞춰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상계엄을 해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권 장악의 기회를 엿보던 신군부의 보안사령부는 1980년 2월부터 ‘K-공작계획’을 세워 언론통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부마항쟁 진압 당시의 교훈을 바탕으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할 경우 ‘강경진압’으로 초기에 진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를 위해 ‘충정훈련’을 강화하고, 헬기를 동원하는 ‘공지협동작전’ 계획을 세웠다. 5월 들어 대학생들의 시위 규모가 점차 커지자 이를 핑계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한밤중에 공수부대를 대학가에 투입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던 대학생들과 정치인을 대거 체포했다.


    1980. 5. 8. 전남대 정문 시위  ©나경택

    1980. 5. 14. 민족·민주화성회 후 금남로 시가행진  ©나경택






    비무장 시위대 향해 집단발포






    이때 전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광주에서만 유일하게 공수부대에 맞서 대학생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 투입된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는 5월 18일 오후 4시에 광주시내에 첫 투입됐는데 출동 1시간 만에 149명을 현장에서 강제 연행했을 만큼 공수부대의 진압은 과격했다. 진압 첫날부터 진압봉에 맞아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둘째 날인 19일 오후에는 시위대를 향해 장갑차에서 소총을 발사하는 등 강도 높은 진압작전이 펼쳐졌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극도의 충격을 받아 공포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공포심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시민들이 직접 시위에 적극 나섬으로써 사흘째인 20일부터 시위는 대규모 항쟁으로 변화됐다. 대규모 차량시위와 더불어 광주MBC가 불탔고, 광주역에서는 야간에 3공수여단의 발포로 최소 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나흘째인 21일 마침내 항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오전 8시 육군본부는 전남·북 일대에 대간첩작전에서 최고 경계 태세에 해당하는 ‘진도개 하나’를 발령, 개인별 실탄분배 등 발포 준비를 마쳤다. 오후 1시경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긴장이 극도로 높아지자 전남도청 앞에 배치된 11공수부대 61대대와 62대대는 수십만 명의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하였다. 이때 계엄군 장갑차에서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러자 시위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위적 수단으로 광주 인근 나주, 화순지역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가져와 계엄군과 대치하면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날 하루에만 45명의 시민이 계엄군 총탄에 맞아 사망했고,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전남지역 일부 청년들도 이날 오후 광주 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로 몰려들었다. 예기치 못한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치자, 신군부 수뇌부지휘부는 당황했다. 권력장악을 앞둔 상황에서 빚어진 집단 발포는 집권 과정에서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사태 악화를 우려해 신군부는 급히 작전을 바꿨다. 21일 오후, 계엄군은 쫓기듯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여, 외곽지역을 봉쇄하고 도시 전체를 외부세계와 차단한 채 압박하는 형태로 작전을 변경했다. 공수부대가 주둔했던 주남마을, 송암동, 교도소 일대에서는 미처 계엄군의 차단선이 설치되었는지도 모른 채 이 지역을 통과하려던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이 쏟아졌고, 그 결과 초등학생을 포함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80. 5. 19. 금남로 시위 현장 ©조광흠

    1980. 5. 19. 금남로 시위 현장  ©조광흠



    1980. 5. 19.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에게 연행되는 시민  ©조광흠

    1980. 5. 19. 금남로 시위 현장에서 부상자를 들것에 실어 옮기는 시민들  ©나경택






    고립 상황에서도 스스로 질서 유지






    계엄군이 물러간 후 광주는 ‘육지 속의 섬’이 되었다. 외부세계와 철저하게 고립된 상태였다. 하지만 시민들은 완벽한 질서를 유지한 채 매일 수만 명씩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모여 민주수호궐기대회를 열어 민주화 의지를 불태웠다. 헌혈을 원하는 시민들이 병원 앞에 줄을 이었고, 시장과 동네마다 아주머니들이 주먹밥을 광주리에 가득 채워 시민군들에게 제공했으며, 가게나 은행 등은 경찰이 지키지 않았지만, 도둑이나 강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해외 언론은 ‘놀라운 희생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헌신적이며 질서를 유지한 채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민 스스로 질서를 유지했던 자치 기간은 짧았다. 단 5일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봉쇄기간 중 광주 시내에서 시민들에 의해 난동 사태가 빚어질 것으로 기대했던 신군부는 예상이 빗나갔음을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봉쇄기간이 길어질수록 광주시민들은 난동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해 갔다. 이런 상황은 신구부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등 타 지역 사람들이 광주의 항쟁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경우 정치적 부담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하였다. 대규모 군을 투입하여 신속하게 진압한다는 방침으로 바뀌었다.



    금남로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시민들 「5·18기록관 발굴영상」 캡처  ©5·18민주화운동기록관

    헌혈하는 시민들 「5·18기록관 발굴영상」 캡처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결사항전으로 끝까지 전남도청 지켜




    전열을 새롭게 정비한 계엄군은 공수부대, 20사단 등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여 진압작전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20사단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미국의 동의가 필요했다. 미국은 비밀리에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하였다.        

    26일 진압작전이 시작되기 전날, 계엄군은 전남도청을 지키고 있던 시민군과 항쟁지휘부에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시민들 상당수는 전남도청을 떠나지 않은 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하여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계엄군은 탱크와 헬기 등으로 중무장한 상태였다. 기껏해야 재래식 카빈 소총 등으로 무장한 시민군 몇백 명이 2만여 명에 이르는 계엄군을 이길 승산은 애초부터 없었다. 항쟁지휘부는 대량 희생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주한 미국대사와 직접 협상을 시도했다. 시민군 대변인은 26일 오후 마지막 기자회견에 참석한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미국이 한국 정부를 설득해서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중지시키고 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적극 중재에 나서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그러나 메시지를 전달받은 주한 미국대사는 그날 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미국 백악관 고위급정책조정회의에서는 5월 22일 이미 신군부의 입장에 동조하여 ‘선 질서 회복, 후 민주화 추진’ 방침을 정한 상태였다. 당시 카터 대통령이 이끌던 미국 정부는 1979년 2월 이란이 이슬람 혁명에 성공하면서 반미 성향으로 돌아서자 한국에서도 이런 사태가 빚어질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5월 27일 새벽 4시에 시작된 광주재진입작전에 최후까지 남아서 결사항전을 벌였던 시민군 17명이 도청 일대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사망했고, 3백여 명이 무장 해제된 채 10일간의 항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10일간의 항쟁 기간을 통틀어 사망한 민간인은 166명, 부상 및 구속은 5천여 명에 이를 만큼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1980. 5. 21.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 ©나경택

    1980. 5. 22. 차량시위대 ©조상기







    1997년 대법원 "광주시민들은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


    1980년 8월 전두환은 신군부 추종자들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5·18은 ‘폭동’으로 불렸고, 광주시민들은 ‘폭도’로 취급돼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신군부는 광주 항쟁이 전남지역 출신 야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음모사건’이라고 규정단정하였고, 항쟁에 가담한 사람들을 내란죄로 처벌했다. 그러나 정작 김대중 자신은  5월 17일 예비검속 때 연행되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이렇듯 큰 비극이 발생한 사실조차 한참이 지난 후 재판이 시작될 무렵에야 알 수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극심한 언론통제 속에서도 광주의 진실은 조금씩 외부 세계에 알려졌다. 전두환 집권 기간 내내 광주학살 책임자처벌과 미국의 책임을 묻는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 미국문화원 방화 및 점거 농성 등이 이어졌으며,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민은 광주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1988년 국회에서 열린 5·18광주청문회 TV 생중계를 통해 처음으로 8년 전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깨닫게 됐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과 시민들의 엄청난 희생, 고립 상태에서도 끝까지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광주시민의 용기를 깨닫고 큰 충격에 빠졌다. 미국 정부도 이때 5·18 당시 한미연합사령부가 20사단의 광주 이동을 승인한 사실에 대해 인정하는 서한문을 우리 국회에 보내왔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후 1995년 5·18 학살책임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고, 마침내 전두환, 노태우 등 17명의 신군부 책임자들이 12·12군사반란죄와 5·17내란죄로 처벌받기에 이르렀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 등이 12·12 군사반란 이후 5·17. 비상계엄 확대 선포를 시작으로 1981년 1월 24일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서 헌정질서파괴범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또한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한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대법원 판결 직후 그해 5월, 대한민국 정부는 17년 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한 ‘국가폭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하였고, 특별법을 제정하여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면서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2011년에는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프랑스혁명 등과 더불어 인류사에서 기념해야할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4·19혁명과 더불어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에 대한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인증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5·18민주화운동기록물 등재를 위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심사 회의(2011.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