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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기록물이란

유네스코 인권관련 세계 기록 유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광주는 항쟁의 대명사로서만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주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자치공동체의 형성 및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유네스코 인권관련 세계 기록 유산
소장/관리처 기록물 명칭 통계연도 보기
프랑스 인간과 시민에 관한 권리 선언 원본(1789, 1791) 2003년 자세히보기
뉴질랜드 1893년 여성 참정권 탄원서 1997년 자세히보기
폴란드 1980년 8월 그단스크 21개조의 요구사항.
거대한 사회운동, 노동조합 ‘연대’의 창설
2003년 자세히보기
캄보디아 투올슬렝 학살 박물관 기록물 2009년 자세히보기
필리핀 필리핀 피플파워 라디오 방송 2003년 자세히보기
레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발트 방식 ―
자유를 찾기 위해 3개국을 연결한 인간 사슬
2009년 자세히보기
오스트레일리아 마보 사건 소송 관련 문서 2001년 자세히보기
아르헨티나 1976년~1983년의 인권 기록 유산 :
국가 주도의 테러 행위에 맞선 투쟁의 진실과 정의, 기억을 담은 기록물
2007년 자세히보기
브라질 브라질 군사 정권의 정보 및 반정보 네트워크 기록물군(群) (1964-1985) 2011년 자세히보기
칠레 칠레 인권기록물 2003년 자세히보기
파라과이 공포의 문서 2009년 자세히보기
바베이도스 카리브해 지역의 노예기록유산 2009년 자세히보기
남아프리카공화국 형사법원 사건번호 제253호/1963년
(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
2007년 자세히보기
도미니카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권 투쟁 및 저항(1930~1961)에 관한 기록유산 2009년 자세히보기
국제접십자위원회 1914-1923 국제전쟁포로기구기록물 2007년 자세히보기
독일 베를린 장벽의 축조와 붕괴, 1990년 2 4조약 2011년 자세히보기
영국 대헌장 1225년본 2009년 자세히보기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1789~1791)

기록물 개요
1789년 여름 파리에서 열린 국민공회에서 완결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최초본과 관련 문건, 그리고 1791년 선언
등재이유
선언문과 관련 문건들은 전세계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존중 분야에 있어 기초를 이루는 문건들이다. 다음 중 하나 이상의 기준에 적합해야 한다.
소장기관
프랑스 파리 국립역사박물관
기록물 소개
이 등재기록물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의 공표와 입법과정에 관련된 문건들이다. 이문건들을 총합적으로 살펴볼 때 선언의 상징성 및 정치적 중요성, 선언이 품고 있는 글귀들의 함의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 현존하는 여러 종류의 선언문을 비교해보면, 역사학자 및 민속학자이 주장하듯 한 종류의 선언문만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선언문 탄생 초기부터 1791년 새 헌법이 공포될 때까지 기간동안 6종의 선언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2종류의 선언문만이 법적인 기준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공회에서 채택되고 왕실의 승인을 거쳐 칙서 또는 법률의 형태로 공포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식적으로 출판된 선언문이다. 전자는 1789년본이며 후자는 1791년 선언이다.

수집물은 1789년 9월 30일 국민공회 회의록에서 발췌된 손글씨로 작성돼 쟝 요지프 무니어 의장과 6명의 비서가 점검한 뒤 1789년 10월 2일 총회의 안건으로 상정했던 인간의 권리선언 문구가 포함됐다; 그리고 루이 16세가 상기 문구들에 대해 ‘나는 국민회의가 나에게 제출한 헌법과 선언문의 조문 전체를 승인합니다. 1789년 10월 5일. 루이’라는 승인문구와 함께 서명했다.

선언문은 프랑스혁명 시기의 유물이며 프랑스 혁명의 원칙과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선언문은 애초에 프랑스어로 이루어진 문구이지만, 공표 이후부터는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및 기타 모든 차별적 요소를 뛰어넘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어왔다. 선언문은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침해받지 않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 기본원칙에 대한 존중이라는 개념을 세웠다. 선언문은 모든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인종적, 경제적 및 사회적 차이를 넘어선 보편적 가치를 말하고 있으며, 모든 개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의무의 개념을 수립하여 인류 역사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선언은 국제법의 근간을 세우는 중요부분이며 1948년 유엔인권헌장의 기초가 되었다.

뉴질랜드 1893년 여성 참정권 탄원서

기록물 개요
1893년 뉴질랜드 의회에 상정된 청원서로 당시 전체 여성인구의 4분의 1이 모든 여성의 참정권 또는 투표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등재이유
뉴질랜드는 여성의 합법적 투표권을 최초로 인정한 자치정부가 되었으며 이 청원서가 그 같은 영광의 상징이자 동력이었다.
소장기관
뉴질랜드 웰링턴 아카이브 뉴질랜드
기록물 소개
유럽에서 보편적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은 국경의 구별을 두지 않고 나타났으며 특히 19세기와 20세기에 활발했다. 비록 당시는 완전한 민주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여러 나라에서 자산가에게만 주어졌던 투표권을 점진적으로 완화시키는 과정에서 (여성에 비해)남성들은 혜택을 보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1918년에 이르러서였다.

뉴질랜드의 경우, 1879년 이래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은 합법적으로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1881년 처음으로 모든 남성들이 투표권을 행사한 총선이 치러졌다. 다른 지역보다는 다소 나은 상황이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1873년부터 납세자에 한해 지방선거에 투표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4년 뒤부터는 학교위원회나 교육위원회에 출마하거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의회선거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확대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어찌어찌해서 이같은 시도가 하원을 통과하더라도 하원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상원에서 번번이 막혔다.

1893년 청원서를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1885년 뉴질랜드 여성 금주연합의 설립자인 케이트 셰파드다. 인본주의와 정의감이 그녀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와 더불어 금주(禁酒), 여성과 아동의 복지등의 문제는 의회에 대표를 내보내고 의원선출 투표권을 쟁취함으로써 진전될 수 있다고 믿었다.

폴란드 1980년 8월 그단스크 21개조의 요구사항. 거대한 사회운동, 노동조합 ‘연대’의 창설

기록물 개요
1980년 8월 26일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파업위원회가 작성한 21개 요구사항: 특별히 이 요구사항은 임금 및 근로조건 등 통상적인 이슈 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성격의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등재이유
폴란드 그단스크 해양박물관; 폴란드 바르샤바 카르타 센터
소장기관
뉴질랜드 웰링턴 아카이브 뉴질랜드
기록물 소개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의 파업은 유럽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온존하던 시절에 발생했다. 소비에트 연합이라는 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의 산물로 탄생한 이래 폴란드를 포함한 동구 위성국가들 사이의 소요사태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저항의 목소리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더불어 다수의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대 소비에트 의존도는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식료품 가격의 인상이 파업의 주요 동력을 제공했고 파업의 몇몇 요구사항은 여전히 실질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요구사항들은 임금투쟁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고 공산주의 지배체제의 본질적 문제를 건드렸다. 파업노동자들은 자유노조 설립, 검열 폐지, 모든 정치범 석방 등을 요구했다. 파업의 지도자는 정치적 반체제 인사로 노조위원장으로 선출된 레흐 바웬사였다.

다른 산업분야에서 동맹파업이 발생하자 정부는 급히 임금인상안에 서명했지만 파업은 멈추지 않았다. 공산당 정부는 그제서야 21개 요구사항의 시행에 동의했다.

요구사항 관철의 실질적인 결과로 1천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참여해 사회운동의 거대한 기초가 되었던 자유노조 ‘솔리데리티’가 설립됐다. 자유노조는 1981년 소비에트 연방의 압력으로 폴란드가 계엄령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불법단체화되기 전까지 1년여동안 활동했다
사진자료
  • 21개 요구 01

    21개 요구 01

  • 21개 요구 02

    21개 요구 02

  • 전시모습 01

    전시모습 01

  • 전시모습 02

    전시모습 02

캄보디아 투올슬렝 학살기념관 아카이브

기록물 개요
전 S-21 감옥 및 취조센터였던 투올슬렝 학살기념관의 아카이브는 5,000여명 이상의 사진 및 이력카드, 고문을 통해 받아낸 ‘자술서’, 기타 수감자, 경비병, 관계공무원의 기록등을 포함하고 있다.
등재이유
크메르루즈 정권에 의해 1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전에 고등학교였던 이 감옥에 수감됐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이 시련을 겪고 살아남았다.
이 곳의 아카이브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에 관한 증언을 담고 있으며 각각의 서류들은 20세기 전 세계를 커다란 충격에 빠뜨리면서 가장 극악한 형태로 자행된 반인륜범죄로서의 학살이 자행됐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다.
소장기관
캄보디아 프놈펜 투올 슬렝 학살기념관
기록물 소개
이 곳의 아카이브는 단일 원천자료로서는 다른 어느 자료들보다 민주캄푸치아(1975~79) 크메르 루즈 치하에서 자행된 야만적 사건을 제대로 폭로하고 있다. 캄보디아인들이 겪은 어마어마한 재앙은 쉽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2~3백만명(전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투옥과 고문을 거쳐 수십만명이 처형됐다.

현재 투올슬렝 학살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역사적 건물은 1960년에 세워진 차오 포네아 야트 고등학교 건물이었다.
크메르 루즈 정권 하에서는 감옥 및 그 악명높은 취조센터로 사용되었다.
이 학교 건물은 전기줄 펜스로 둘러쌓였으며 각각의 교실들은 수감실과 고문실 등으로 활용되었고 모든 창문들은 철재 가림막과 탈출을 막기 위한 전기줄 장치로 덮여있었다. 불과 2~3개월 사이에 최소한 15,000명 이상이 이 곳에 수감되었다.
대부분 투올슬렝 감옥 수감 기간 중 체웅 엑 ‘킬링필드’에서 처형됐다.
처음에는 이전 정부인 론 놀 정권에 관련된 인물들 또는 의사, 교사, 기술자, 크메르루즈가 지식분자로 낙인찍은 인사 등 전문가들이 이 곳에 수감되었다. 나중에는 크메르 루즈 우두머리인 폴 포트가 부하들을 의심하면서 당 지도부 내의 인사들도 이 곳에 수감됐다.

3분의 1 가량이 수감자들의 자료로 채워진 이 아카이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공포스러운 테러의 작동장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수감자들은 강제로 자술서를 써야 했으며 가족, 친구 동료를 배반하도록 강요받았다. 5,000건 이상의 개인카드(사진포함)이 존재한다. 4,000건 이상의 ‘자술서’가 남아있는데 대부분 고문으로 자신 또는 다른 사람들의 연루사항을 자백하도록 한 것이다.
크메르루즈 노트, 입감자 및 자백을 통해 밝혀진 연루자 명단, 감옥 통계, 모든 수감자들에게 채워졌던 1,200개가 넘는 손발 족쇄를 포함한 고문 도구 및 속박장치 등을 통해 테러의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명징하게 드러낸다.

반인륜범죄가 비록,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 체계와 규모에 있어서 캄보디아처럼 자국의 정권에 의해서 극한의 탄압을 받은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찾아주기 위한 독특한 실험으로써 캄보디아 왕립정부와 유엔은 국내법 및 국제법을 근거로 국제법의 기준과 국내법의 절차에 따라 국내외 재판부, 검찰부, 변호사부가 참여하는 혼합재판소를 설립했다.
이 캄보디아특별사법재판소(ECCC)에 처음으로 기소된 사람은 덕(Duck)으로 알려진 전 21보안대(S-21감옥) 소장이었던 카잉 구엑 이브였다.
이 아카이브에서 드러난 증거들이 그 재판에 큰 영향을 끼쳐 그는 반인륜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2012년 그의 변론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 장소는 1979년 크메르 루즈의 몰락 이후 기념관으로 전환됐으며 캄보디아인들에게 자행된 충격적인 비극을 말해주는 한편 전제주의 정권이 저지른 반인륜범죄의 기록들이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국제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가 되었다.
사진자료
  • 캄보디아 01

    캄보디아 01

  • 캄보디아 02

    캄보디아 02

  • 캄보디아 03

    캄보디아 03

  • 캄보디아 04

    캄보디아 04

필리핀 피플파워 라디오 방송

기록물 개요
1986년 마닐라에서 마르코스 마닐라 대통령 체제에 항거해 발생한 평화적 민중혁명 기간 동안 생방송으로 방송됐던 라디오 방송의 비편집 음성 기록물. 민중 항쟁이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방송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등재이유
(필리핀 라디오)방송은 이후의 민중항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베를린 장벽의 붕괴 등 사건을 보도하는데 있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냈다. 이 방송은 또한 20세기의 한 세대를 마감하는 최초의 민중혁명 중 하나에 관한 독특한 기록물이다.
소장기관
필리핀 퀘손 정보국
기록물 소개
이 기록물은 1986년 2월 22일 저항이 시작된 날로부터 필리핀 혁명의 전과정을 담은 완전하고 편집되지 않은 기록물이다. 이 시기 4일간의 기간은 단 한 사람의 사망자 없이 비무장으로 긴박했던 군 대치상태를 풀어낸 평화적 민중항쟁을 통해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였다.

이 기록물은 오디오카세트테이프 44개(61시간 33분), 미니디스크 1개(25분)의 편집되지 않은 4일간의 일일기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라디오 베리타스(마닐라 외곽의 카톨릭 소유의 라디오방송국), DZRJ/DZRB, 라디오 반디도(당시 국방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개인 소유의 라디오방송국, 퀘손시티 소재), DZRH(마닐라 개인 소유 방송국), 필리핀의 소리(1986년 2월 24일 민중들이 주도한 라디오 베리타스에 흡수된 정부 소속 라디오 방송국) 등이 생산한 기록물들이다.

라디오 기록물은 주로 EDSA로 알려진 마닐라 에피파니오 데 로스 산토스 거리를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했다.

뜻하지 않게 수 만명의 군중들이 EDSA 양쪽의 군인들에 갇히게 됐다. 이 곳에서 군중들은 나흘동안 기도하고 노래 부르고 거리를 막고 군중을 가두고 서 있는 군인들에게 꽃을 꽂아주었다. 사흘째 되던 날, 기적이 일어났다-친위부대가 저항군의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열어준 것이다. 오르티가스 가의 구석에는 지금 평화의 여신, EDSA의 여인 상이 자리하며 20년 마르코스 독재를 무너뜨린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비폭력 저항 뿐만 아니라 평화와 자유를 향한 필리핀인들의 갈망을 상징하고 있다.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저항의 4일동안 역사적 거리를 꽉 채웠던 이들을 기념하는 ‘민중의 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필리핀 민중혁명은 동시다발적인 민중항쟁을 통해 견고한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로 20세기의 매체인 라디오 방송의 위력을 보여준 것이었다. 라디오 방송은 4일 동안의 저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냈다. 이 음성기록은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매체 및 발전의 도구로서의 라디오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세계가 듣고 보고 읽었다. 이 사건은 크나큰 국가적 위기 상황을 평화적으로 해소해나가는 훌륭한 사례를 제공해 주었다.

발틱웨이 자유를 찾기 위해 3개국을 연결한 인간 사슬

기록물 개요
발틱웨이는 1989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3국이 연대하여 평화적 저항을 펼친 정치적 시위였다. 이 저항의 의도는 50년 전인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구 소련 사이에 맺어진 불가침 조약의 비밀협약을 추궁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조약의 내용은 유럽을 분할해 발틱 3국을 소련으로 편입시킨 것이었다.
등재이유
발틱웨이는 3개국에 걸쳐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벌인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비밀 조약의 음흉한 일면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으며 정보의 자유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운동은 또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각국이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할 이유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자체의 민주화운동을 끌어내기도 했다.
소장기관
에스토니아 국립 아카이브, 에스토니아 필름 아카이브(탈린), 라트비아 대중전선 박물관(리가), 리투아니아 중앙 아카이브(빌니우스)
기록물 소개
1989년 8월 23일 발틱해 연안 3개국에 살고 있는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탈린의 툼피아 초입에서부터 리가와 다우가바 강을 가로지르며 빌니우스 게디미나스 탑 입구까지 600 Km에 이르는 인간사슬을 형성했다. 이 저항의 목적은 다목적이었다: 한가지는 1939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비밀 조약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발틱 3국의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재고하라는 것이었다.

그 조약은 나찌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 사이의 불가침 조약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촉발시켰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일주일 전에 체결됐다. 하지만 1939년 당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은 전쟁 후 유럽을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권으로 분할한다는 조항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1945년 종전에 이르러 소비에트 연방은 이미 발틱 3국을 점령한 상태였고 냉전기간 내내 그 비밀조약의 존재는 부인돼 왔었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소비에트 정부와 사회에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개혁개방정책을 도입했다. 그 결과 발틱 3국에 대한 소련의 통제가 느슨해진 사이 1988년 8월 23일 각국의 수도인 빌니우스, 리가, 탈린 등지의 대중 집회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의 비밀조약이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1989년 봄, 소비에트 전체인민대회에서 발틱 3국의 대표들은 비밀조약이 합법적인 공간으로 나와야 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발틱 3국에서는 조약체결 50주년 기념일인 8월 23일 대규모 시위가 계획됐다.

발틱웨이는 비폭력적이었고 국경을 넘어선 연대에 기반을 두었으며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러시아인, 벨로루시인, 폴인, 타타르인 과 수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마지막 날 발트3국이 제기한 질문은 제한된 지역 정치인과 공무원들만의 이슈가 아닌 좀 더 폭넓은 의제의 일부가 되었다. 1989년 12월 소비에트 전인민대회는 1939년 당시 비밀협약이 무효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페레스트로이카 도입 이후 소극적으로 진행되던 민주화가 이제 발틱3국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맹내부에서까지도 확신과 동력을 얻게됐다.

돌이켜보건대, 발틱웨이는 냉전체제 및 2차세계대전 체제의 종말을 상징하게 됐다. 자유를 갈망하는 3개국의 연대는 독특하고 평화로운 시위였고 방법적 명료성은 또한 전제주의를 이겨낸 인본주의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문건, 사진, 필름 등 수집물은 에스토니아 7곳, 라트비아 8곳, 리투아니아 23곳에 나뉘어져 발틱웨이의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사진자료
  • 라트비아 01

    라트비아 01

오스트레일리아 마보사건 필사본

기록물 개요
에드워드 코이키 마보의 개인 서류 및 마보사건과 관련된 법정기록물 및 역사적 자료들
등재이유
무주지 선점론(테라 눌리우스 독트린)이라는 침략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법체계에 대항하여 전래되어 오는 법취지를 인정받은 지극히 독특한 사건. 마보사건은 식민주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자 전 세계 원주민들에게 이정표같은 사건이었다.
소장기관
호주 캔버라 국립박물관
기록물 소개
원주민 활동가인 에디 마보의 노력은 그가 사망한 직후인 1992년 호주 대법원의 결정으로 테라 눌리우스 독트린을 뒤엎는 빛을 발하게 됐다. 이 판결은 원주민의 지위와 토지소유권 및 인종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호주의 법률적 지평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보 사건의 중요성은 인류 역사상 지극히 예외적으로 ‘침략자’ 문화의 바탕 위에 법률체계에 대항하여 전통적인 부족의 법체계의 우위성을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이다.

마보 개인 자료는 일기, 서신, 사업관련 서류, 개인 기록, 재정관련 서류, 법률 관련 서류, 신문 클리핑, 개인적 인쇄물 등으로 구성돼 있다. 법률 관련 서류로서는 증거물, 증거 서류, 원고측 변호사 및 의뢰인 또는 증인간 오간 서한 등이 있다.

서류들의 생산연도는 1959년부터 1992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호주에서 인종간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차대한 시점인데 토지의 소유권이나 사용권 그리고 점증하는 인종 차별 문제, 원주민 관련 사회적, 보건적 문제 등으로 심각한 다툼과 법정분쟁이 심해지던 때였다. 이 때는 또한 소규모 원주민 활동 지도자들이 등장하던 시기이기도 하며 이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마보사건 필사본은 19세기 최초 유럽인들의 도래 시점까지 파고드는 머레이 섬 토지 소유권과 관련된 서류 필사본 등을 포함하고 있다. 마보 서류, 특히 법정 관련 서류는 역사상, 그리고 토레스 제도 내 머레이 섬 사회에서 볼 때 특별한 원천자료들이다. 이와함께 노쓰 퀸즈랜드의 사회현황 및 고용현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원주민들, 특히 토레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경제적 지위향상과 합법적 권리 확인을 목표로 투쟁했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서류들은 호주의 원주민들, 특히 토레스 제도의 원주민들에게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다. 마보사건은 대법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이며 그 판결은 호주 토지분쟁에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서류들은 원주민들과 비원주민들 양측 모두에게 심대한 중요성을 갖게 됐다.

게다가, 호주에서의 이같은 논쟁은 뉴질랜드, 북아메리카 그리고 최근 10여년 동안 들어 최초국가(the first nation)의 권리에 관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른 지역 등지에서 큰 관심을 끌었다.

이 기록물들은 마보의 전기작가인 노엘루스가 사용하기도 했으며 마모와 마보사건을 다룬 영화가 상을 받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이 기록물들은 따라서 간접적으로 에드워드 마보에 관한 대중의 인식 및 마보사건 자체를 대하는 대중의 이해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사진자료
  • 뉴질랜드 01

    뉴질랜드 01

  • 뉴질랜드 02

    뉴질랜드 02

  • 외형및 전시사진 01

    외형및 전시사진 01

  • 외형및 전시사진 02

    외형및 전시사진 02

  • 외형및 전시사진 03

    외형및 전시사진 03

  • 외형및 전시사진 04

    외형및 전시사진 04

아르헨티나 (1976년~1983년)국가 주도의 테러 행위에 맞선 투쟁의 진실과 정의, 기억을 담은 기록물

기록물 개요
1976년~1983년 18개 인권과 기본권적 자유 유린기관에 보관된 온전한 자료(사진 및 음성기록)
등재이유
이 아카이브는 불법 탄압 행위, 고문, 학살, 강제실종에 관한 구조적이고 광범위한 증언 및 아르헨티나 인권이 유린되는 암울한 상황을 넘어 투쟁과 저항, 진실과 정의를 향한 기록이 포함돼 있다.
소장기관
부에노스 아이레스 국립기념아카이브 및 전국 18개 기관
기록물 소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아르헨티나는 군사위원회의 통제하에 있었다. 눈까마스(NUNCA MAS, 다시는 결코)라는 모토 아래, 군사위원회가 저질렀던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범죄가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이 자료들이 공헌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 기록물들은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책임소재가 돌아갈 수 있는 인권 및 기본권적 자유의 유린뿐만 아니라 인권과 정의, 연대를 배경으로 싸워온 기관 및 시민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기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자료는 국가단위, 지역단위 및 도시단위 정부기관과 인권조직 및 개인이 생산한 다양한 기록물들로 구성돼 있으며 아르헨티나에서의 강제 실종, 인권유린 등 주제와 관련되어 있고 콘도르 작전으로 알려진 바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볼리비아, 페루 등 탄압의 협조체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자료들로 구성돼 있다.

이 문서들은 군사독재 시대 광범위하게 자행됐던 국가폭력을 증언하고 있다. 1976년~1983년 사이의 국가기관이 생산한 자료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때로 그 이전이나 그 이후의 자료들도 포함됐다; 이와 함께 정부에 대한 성토, 국내, 국제적인 연대, 강제 실종 피해자 탐색, 정의와 진실을 쟁취하기 위한 활동 등의 방식으로 투쟁해온 인권조직이나 개인의 자료도 포함돼 있다. 또 1983년 민주화 회복 이후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가 독재정권의 인권유린 해명, 실종자 규명, 과거 자행됐던 반인륜범죄 재판을 위한 자료수집 등을 위한 목적으로 생산한 자료들도 포함됐다. 필기 및 구술에 의한 증언, 성명서, 사진, 합법적 언론 기록, 정보보고서, 강제 실종자 목록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이는 군사독재가 자행한 탄압과 불법구금, 비밀 교도소, 고문, 강제 실종 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됐다.

이 기록물들은 아르헨티나 국내외 재판과정에서 증거로 채택됐다. 이와 함께 남미지역 단위에서 반인륜범죄로서의 실종자 문제를 이슈화하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이른바 ‘진실을 향한 권리(rights to truth)를 강화하고 모든 인간이 강제 실종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개념을 명확히 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이 자료들은 소중한 교육도구가 되어왔고 현 세대와 미래 세대에게 관용과 비차별, 인권에 대한 대화 및 이행의 기본 바탕 위에 평화의 문화를 건설해야 한다는 교훈과 이해를 주는 교육도구로 활용됐다.

브라질 군사 정권의 정보 및 반정보 네트워크 기록물군(群) (1964-1985)

기록물 개요
브라질 독재정권이 생산한 경찰, 군대, 국가기관 자료
등재이유
이 기록물의 중요성은 군사정권과 정권의 경찰들이 활용했던 감시사찰 방법과 강압정권의 피해자들의 가치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데 있다. 감시사찰 장치들은 라틴아메리카 인권유린을 가져왔던 콘도르 작전의 일환이었다.
소장기관
브라질 여러 곳의 아카이브 기관
기록물 소개
1964년 3월 31일, 후아오 굴라트 대통령은 20여년동안 지속돼 왔던 민주질서를 끝장 낸 쿠데타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4월 9일 새로운 군사정권은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일련의 법적 장치 가운데 첫 번째 법안을 도입했다. 약속과는 정반대로 군사정부는 강압적 내용을 담은 신헌법을 제정하고 언론의 자유 및 정치적 반대의 자유를 질식시켰다. 정권은 모든 언론매체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고문을 자행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거세시켰다.

국가보안법에 의거, 6,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법 위반 유죄판결을 받거나 기소됐다. 5만여명이 경찰 심문을 당했으며 3만여명이 고문받다 수백여명이 사망했다; 아직 다수의 시민들이 실종상태에 있다. 수천명의 시민들이 군사정권 사법부에 의해 고발되고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생산된 기록물로 헌병대 취조 및 사찰기록, 권리박탈, 용의선상에 있는 개인 및 집단, 조직의 통제, 군대의 협약,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문건들로 구성돼 있다. 반독재 저항의 기록과 민주화 건설 및 노력 등 점진적 민주화에 대한 사항도 기록돼 있다. 17개 부분으로 구성된 이 독특한 아카이브는 20세기 후반 라틴아메리카에서 나타난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자료들은 브라질 군사정권의 정보 및 반정보 네트워크가 생산한 자료들로 구성돼 있으며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정권들과 연계돼 있다.

이 자료들은 군사정권의 정책과 행동양식을 알아보는데 필수불가결한 원천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은 당시의 기억을 보존하고 복구하여 시민의식, 민주주의, 인권 증진에 기여하기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의 공동 노력으로 온라인으로 출판되었다. 누구나 접근가능하며 이 자료들은 세계 역사에 있어 중요한 증언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세계 여러 곳의 정부들이 반공이라는 명목하에 등장하게 되고 한편으로 공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경우, 이처럼 온라인을 통해서 아카이브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정보접근권에 있어서의 민주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며 ‘잊지 않으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모토 아래 공평하고 평등한 시민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지극히 가치있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칠레 인권아카이브

기록물 개요
칠레의 여러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재판기록, 신문기사, 사진 및 기타 역사적 문건 수집물
등재이유
이 아카이브는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 독재시기의 독특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오늘날까지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권에 대한 유린과 옹호라는 주제가 아직 생동감있게 살아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소장기관
칠레 국립 아카이브, 산티아고
기록물 소개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는 아우그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사독재의 통치를 받았다. 17년 동안 독재정권은 칠레 역사에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구조적인 정당 박해와 반체제인사 탄압이 자행됐다.

칠레 인권아카이브는 여러 기관에 보관된 다양한 기록물들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권유린과 인권수호에 관한 역사적 기억을 미래세대를 위해 잘 보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 기록물들은 독재통치 기간 동안 박해받고 구속되었던 사람들이 압제에 저항하거나 연대하며 활동했던 역사적 순간을 담고 있는 이 기억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이 아카이브는 당초 정보들을 보존하고 독재시기 실종자들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자료들은 각기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인권관련 주제에 관한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 종류가 있다. 특히 체포, 정치적 처형, 추방, 고문, 실종 피해자들에 관한 역사적 기사기록 등을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 정치적, 사법적 측면에서 국내외 인권기구들의 참여와 관련된 역사적 유물 문건들도 있다. 인권유린을 성토하고 인권기구들의 활동에 관한 정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조직된 팀들이 생산한 리플렛, 포스터 등도 보관되어 있다. 사법 기록물로는 법정 증언과 실종자 관련 재판 판결문 등이 있다.

최근 수백년동안 라틴아메리카는 수많은 독재정권, 전제정권의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이 지역의 미래를 위해서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 지역내 나라들이 인권유린과 관련된 기억들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칠레의 아카이브를 보존할 필요성이 충분하다. 민주주의의 존재이유와 인권 존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재가 어떻게 작동했었는지를 알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 나라가 테러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를 선택할지 아니면 이전의 실패를 되풀이할지는 오로지 과거를 알고 반영하는 수 밖에 없다.

파라과이 공포의 아카이브

기록물 개요
35년 동안의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파라과이 독재 통치기간의 공문서 모음
등재이유
이 아카이브는 콘도르 작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경찰의 탄압, 정치적 탄압, 고문, 암살, 비밀정보활동 등에 관한 증거물들이다.
소장기관
인권보호를 위한 기록보관센터
기록물 소개
공포의 아카이브는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너 독재통치 35년간 기간동안 생산된 경찰 문건 및 탄압관련 공식문건들이다. 이 기록물들은 스트로에스너 정권이 몰락하고 독재자가 브라질로 망명한 지 3년 후인 1992년 발견되었다. 이 문건들은 50,000여명의 살해기록, 30,000여명의 실종기록, 400,000여명의 수감기록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 라틴아메리카 우익 독재자들(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파라과이, 우루과이)이 자행한 암살 및 정보작전 등 정치적 탄압관련 프로젝트였던 콘도르 작전의 존재를 백일하에 드러내는 증거들이다.

이 기록물들은 대부분 스트로에스너 정권하에서 경찰이 생산한 자료들이다. 지독한 편집증세를 보였던 정보국 수장 파스토르 코로넬이 가능한 모든 문서를 복사해놓은 덕분에 자료들은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이 자료들 가운데는 1888건의 인적사항 기록카드 및 여권, 20,000여건의 사진, 11,225건의 색인카드와 경찰이 몰수한 물품들 등이 포함돼 있다: 개인서신, 정치적 문학작품, 사진, 팜플렌, 서적, 신문 클리핑 등이 포함된다. 아 아카이브는 스트로에스너 정권이 자행한 구조적이고 광범위한 탄압, 고문, 살인, 실종 등이 관한 뚜렷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공포의 아카이브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트로에스터 전제정권이 어떻게 사회적 가치, 문화, 사회적 행동양식, 인간관계 형성에 해악을 끼쳤는지를 조사하고, 분석해 이해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데 완벽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아카이브는 또 공포의 정권이 사람들을 임의로 구속하고 사법체계를 마비시키고 파라과이인들의 대량 이주를 촉발시켰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이 자료들은 정치적 신념이나 이상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기 위해 구조적인 방식으로 신체적, 정신적 고문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아카이브의 발견은 두가지 큰 결과를 이끌었다. 첫째, 억압자들에 관한 증거를 찾기 위한 국내외 조직의 탄생을 이끌었다. 둘째, 실종자, 수감자, 고문희생자들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과거의 진상에 대해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였다. 수천명의 파라과이인들과 외국인들이 스트로에스너 정권과 콘도르작전의 피해를 입었다. 이 아카이브가 발견되면서 대량 인권 유린 사태에 관련됐던 탄압의 주체들과 국가의 요원들을 처벌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아카이브는 또한 전 세계적으로 인권관련 국제재판과정에서 훌륭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 파라과이의 자료들은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변호사 또는 재판부에 제공됐다. 이 자료들 상당부분이 피노체트 장군 재판에 활용됐다.
사진자료
  • Apolonia Rotela Flowers 01

    Apolonia Rotela Flowers 01

  • Apolonia Rotela Flowers 02

    Apolonia Rotela Flowers 02

  • Dora Marta Landi 01

    Dora Marta Landi 01

  • Dora Marta Landi 02

    Dora Marta Landi 02

  • Mario Schaerer Prono 01

    Mario Schaerer Prono 01

  • Mario Schaerer Prono 02

    Mario Schaerer Prono 02

  • Martin Almada 01

    Martin Almada 01

  • Martin Almada 01

    Martin Almada 02

바베이도스 카리브해 지역의 노예기록유산

기록물 개요
노예들의 생활상을 다룬 옛 법률문서, 농장 거래원장, 부동산 목록, 희귀서적, 인쇄물 및 회화 원본.
등재이유
카리브해 노예기록유산은 카리브해 지역 노예들의 삶을 반영한 독특한 기록물이다. 바베이도스의 노예운영시스템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 플랜테이션의 모델이 되었다.
소장기관
바베이도스 역사사회박물관, 성 미첼 쉴스톤 기념박물관
기록물 소개
바베이도스 역사사회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카리브해 노예기록유산은 17세기~19세기 사이 카리브해 지역 노예들의 삶을 보여주는 독특한 문서들의 모음이다.

이 기록물들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전 지구적인 규모로 노예제가 합법화되고 산업화되었던 시기의 기록물이다. 또한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현대 세계 발전과정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바베이도스에서 경제적인 관점에서 완벽하게 구현됐던 노예노동 및 노예소유 시스템은 안티구아, 자메이카, 사우스 캐롤라이나, 기아나, 트리니다드, 수리남 등 각 지역의 식민지로 전파되었다. 바베이도스의 노예관련 법령은 서인도 제도와 미국까지도 바탕으로 삼았던 본보기가 되었다.

박물관의 수집기록물들은 재질별로 몇 가지 범주로 나뉜다. 플랜테이션의 일상을 다룬 서한을 통해 노예주들의 태도 및 신념체계를 들여다볼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노예들을 다루었는지, 주종관계의 노예들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토지분할 지도를 통해서는 농장의 모습을 그린 그림과 토지자산들을 어떻게 구획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기록물들을 통해서는 토지 소유자들, 노예주종관계, 토지구획 및 부동산의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다. 농장의 각종 장부는 노예제도의 핵심인 농장기업의 본질을 보여준다. 유언장 등의 기록물은 노예들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아닌)재산으로 취급받았는지를 보여준다. 노예들은 때론 빚 청산용으로, 때론 선물용으로 (노예주의)친구나 가족 구성원들에게 팔려다니거나 임대되었다. 정부의 기록들은 노예들의 노동으로 세워진 플랜테이션 사회의 번영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적구조를 설명한다. 이밖에도 이 기록물들은 교회, 군대, 법률기록, 매매증서, 노예등록 및 다양한 출판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 기록물들을 통해 17세기 첫 10년동안 변방의 고립된 정착지였던 바베이도스가 경제적 부흥을 가져오면서 영국 식민지 가운데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바뀌어갔던 사실들도 보여주고 있다. 정착 초기 20여년의 기간 동안 바베이도스의 경제는 2세기 이상동안 이 지역을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고 지금도 그 같은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탕수수 산업의 발전과 노예제의 도입 등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이 기록물들은 바베이도스 연구학자들에게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유산을 되찾게 해주고 있다.
사진자료
  • A letter from Governor Sir Lionel Smith to Dr. John Manning requesting him to pardon 2 slaves dated 31st July 1834.

    A letter from Governor Sir Lionel Smith to Dr. John Manning requesting him to pardon 2 slaves dated 31st July 1834.

  • Compensation Claim for 103 Slaves

    Compensation Claim for 103 Slaves

  • Plan of Friendly Rock Plantation, Barbados dated 1817

    Plan of Friendly Rock Plantation, Barbados dated 1817

  • Travel Licence for a slave named William dated 16th March 1818

    Travel Licence for a slave named William dated 16th March 1818

남아프리카 공화국 형사법원 사건번호 제253호/1963년(넬슨 만델라 등에 대한 공소문)

기록물 개요
반아파르트헤이트 조직,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및 이 조직의 최고지도자들을 심리했던 리보니아 재판기록으로서 이 재판으로 넬슨 만델라가 수감됐다. 이 기록유산에는 문건 및 재판관련 전시물들이 포함돼 있다.
등재이유
이 재판의 결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부당함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또한 이 재판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주의 정책에 항거하는 국제운동이 강화됐으며, 아파르트헤이트는 ‘인간성에 대한 범죄’라는 유엔의 선언을 이끌어냈다.
소장기관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레토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립 기록물서비스
기록물 소개
20세기 초부터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제대로 인정받고자 하는 시도를 펼쳤다. 1912년 1월 8일 수백명의 아프리칸들은 블룸폰테인에서 집회를 갖고 남아프리카 원주민 민족회의(ANC)를 결성했다. 처음에 그들의 저항은 비폭력을 표방했으며 주로 시민불복종 운동이나 동맹파업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계속해서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자유라도 빼앗아내는 법안을 계속해서 채택했다. 1955년 ANC는 자유헌장을 채택했으며 이는 후에 ANC가 내거는 정책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또한 민주남아공 헌법의 원칙이 되었다.

1960년 3월 21일 샤퍼빌 경찰서 외곽에 일단의 군중이 집회를 갖고 있을 때 경찰의 발포로 69명이 사망하고 180명이 부상당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전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됐다. 정국불안이 심해지자 정부는 1960년 ANC와 범아프리카회의(PAC)를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이는 결국 1961년 ANC와 PAC에 속해있는 움콘토 웨 시즈웨라는 군사조직의 태동을 가져왔다. 넬슨 만델라는 이 움콘토의 수장으로 선출됐다. 1962년 8월 5일 해외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넬슨 만델라는 체포됐으며 나머지 지도부들은 1963년 7월 11일 요하네스버그 인근 리보니아의 릴리스리프 농장에서 붙잡혔다. 리보니아 재판(남아프리카공화국 대법원 트란스바알 주 관할 형사사건번호 253/1963 넬슨만델라와 친구들)이라고 알려진 이 재판은 1963년 10월에 시작돼 1964년 6월에 끝났다. 기소된 11명 중 1명은 동료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여 풀려났으며 8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이 내려졌고 나머지 2명은 석방됐다. 1964년 4월 20일 넬슨 만델라는 법정에서 진술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그 자리가 지독한 검열 속에서 전국의 방청자들에게 ANC와 움콘토의 정신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진술을 마쳤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조화와 동등한 기회 속에서 살아가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간직해왔다. 이는 내가 그 안에서 살고 싶고 이루고 싶은 그런 이상이다.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면 그것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그런 이상이다”. 이어서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다 1990년 2월에 이르러서야 석방된 뒤 1994년 5월 10일 마침내 민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리보니아 재판은 소수였던 백인 정부가 성공적으로 ANC 지도부를 박해한 최초의 재판이 됐지만 결국 1994년 4월 27일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가 치러치면서 끝을 본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시간이 흐르면서 프레토리아 법원에 보관된 서류들은 사라진 가운데 증인진술 요지를 담은 책자 3권, 피고진술서 1권, 릴리스리프 농장에서 수거한 증거품, 최후논고, 재판부 선고취지문 및 심리완료 기록, 구술녹음기용 녹음벨트, 시간기록 매체 등이 남아있다.
사진자료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 도미니카 공화국의 인권 투쟁 및 저항(1930~1961)에 관한 기록유산

기록물 개요
문건, 출판물, 사진, 필름, 신문파일, 서신, 증언 등 트루히요 정권의 국가폭력에 관한 공식 기록물 아카이브
등재이유
이 수집물은 트루히요 정권의 잔혹성에 관한 기록들, 그리고 민주주의, 자유, 인권존중을 향한 도미니카인들의 저항운동의 증거들을 담고 있다..
소장기관
도미니카저항운동기념박물관
기록물 소개
1930년부터 1963년까지 도미니카 공화국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혹독한 라파엘 트루히요 독재정권의 압제를 감내해야 했다. 구조적인 억압아래 도미니카인과 외국인 등 수천명이 투옥되거나 고문당하고 암살됐다. 트루히요는 도미니카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던 10,000명 이상으 ㅣ학살을 개인적으로 명령했다. 트루히요 정권의 국가폭력 정책은 국내의 범위를 넘어 해외에서도 암살이 자행됐다.

이 기록물은 문건, 출판물, 사진, 필름, 신문파일, 서신, 망명조직의 기록, 수감 기록, 고문사진, 불법처형단원의 증언, 공동매립지에서 발굴된 유해의 부검보고서, 군인 및 시민 목격자의 증언, 공동매립 등록문건 및 매립지 관련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전제정권이 소멸된 뒤 유력 언론이 보도한 고문피해자, 또는 불법 피수감자 피해자의 진술 및 피수감자의 사진과 실종 또는 암살 피해자들에 관한 기사등도 포함되어 있다.

자료 중 많은 부분이 정권의 완벽한 통제 속에서 왜곡된 정보를 제공했던 (정권과)언론매체의 공모 사실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아울러 이 기록들은 불법체포, 고문, 정치적 인종청소, 성차별, 강제실종 등 대중탄압 시스템의 반박할 수 없는 근거를 구성하고 있다. 아카이브는 또 독재시기와 동시대에 나타난 저항운동,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 인권존중 등에 대한 증언도 내포하고 있다.

이 자료들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하고 과거의 역사를 미래세대에게 알려주는 작업은 개인적, 집단적 권리를 회복하는 것이자 망각과 미망이라는 공범행위를 넘어 역사적 기억이라는 개념을 강화시키고, 젊은이들의 인식의 수준을 제고하며 도미니카 역사에 대한 지식을 풍부하게 한다.

요약하자면 이 유산은 매우 소중한 교육적 도구일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를 형성하고 관용과 비차별, 인권존중의 바탕 위에서 평화의 문화를 구축해나가는 자산이 될 것이다. 이 유산들은 또 반인륜범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진실과 정의를 누릴 권리에 관한 개념을 만들어냄으로써 라틴아메리카와 전 세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도미니카 공화국은 이제 국가와 시민사회가 힘을 모아 민주적 시스템을 건설하고 역사적 기억을 복구,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당시에 생산된 문서자료 및 음성자료들은 진정한 민주사회 건설에 있어 지극히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원천자료들이다. 이 자료들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지금까지도 계속되어오고 있는 반인륜범죄를 방지할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진자료
  • Hermanas Mirabal

    Hermanas Mirabal

  • 9 1949 Manifiesto

    9 1949 Manifiesto

  • Hermanas Mirabal

    Hermanas Mirabal

국제적십자위원회 1914-1923 국제전쟁포로기구기록물

기록물 개요
1914년 제1차세계대전 초기 설립시기부터 1923년까지 국제전쟁포로기구의 기록물
등재이유
수많은 전쟁포로(PoWs)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정부차원의 대응에서부터 본국송환과 가족 재결합 노력까지 대규모 전쟁에서 치러야 했던 개인적, 인간적 비용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 국제전쟁포로기구의 방대한 기록물
소장기관
스위스 제네바 국제 적십자 적신월 박물관
기록물 소개
1914년 전쟁 발발 3주 후 적십자사 국제위원회(ICRC)가 창설한 국제전쟁포로기구의 주요임무는 2가지였다: 첫째, 전쟁 당사국들에게 전쟁포로 보호 및 인간적 대우에 관한 기존의 협의사항에 대한 유권해석을 제공하고, 둘째, 특히 전쟁포로 및 난민 등 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간 관계를 재연결시키기 위해 개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다.

이런 사업이 이 정도 규모로 진행된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국제전쟁포로기구는 가장 규모가 컸을 때 1200명을 고용한 방대한 조직이었으며, 1918년까지 44개국과 그 식민지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시민들이 연계됐던 전쟁에서 유래 없는 성과를 올렸다. 6천5백만명 이상이 전투에 참가했고 그 중 9백만명이 사망했으며 7백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국제전쟁포로기구가 자리잡은 제네바는 유럽과 세계 각 지역으로 배달될 수백만가지의 우편물이 모이는 중심지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을 때 프랑스와 독일 포로들의 본국 송환을 위한 집합소가 되었다.

기록물들은 크게 3개 범주로 구분된다. 첫째는 국제전쟁포로기구 집행부의 기록물로서, 체포장소, 중립적 지위를 보장한 수용, 부상당한 병사들의 본국송환 등 포로들의 처우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중에는 인권단체와의 협조, 수용소 방문 보고, 언론 보도자료 제공 등 국가차원의 대응에 관한 기록물도 포함된다.

두 번째 기록물 그룹은 의료진 및 전쟁에 휘말린 시민들에 관련된 것들로서, 포로로 잡힌 위생병들의 본국송환과 처우보장을 위한 노력들을 보여준다. 특히 적국의 강제합병으로 난민이 되어 적국의 국경 안에 생활할 수 밖 에 없게 된 시민들의 지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세 번째 범주는 전쟁포로와 실종자의 생사여부에 관한 기록물들이다; 이는 가족들의 정보 제공 요청에 따라 작성된 뒤 이름별로 파일화된 것들도 포함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기록물은 찰스 드골 프랑스 장군부터 무명의 병사까지 다양한 국적, 나이, 배경을 가진 2백만명에게서 추출한 7백만건의 인덱스카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함께, 전쟁 중에 인간의 고통과 그 고통을 덜어내고자 했던 독특하고 광범위하며 감동적인 증언도 기록물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 장벽의 축조와 붕괴, 1990년 2+4조약

기록물 개요
1961년부터 1990년 사이 베를린 장벽을 다룬 15부류의 연대기적 기록물로 TV 뉴스, 필름, 사진 및 공문서 등을 포함하고 있다.
등재이유
이 기록물들은 1961년부터 냉전의 종말까지 독일, 유럽 및 전세계에 걸친 정치적 유산 및 집단기억에 관한 원초적이고 독특한 문헌들이다.
소장기관
베를린, 포츠담, Kleinmachnow, 함부르크 등 독일의 여러 기록관
기록물 소개
나찌 독일을 물리친 반 히틀러 연합의 승리 후에도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자국의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이른바 동서분쟁,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체제가 전 세계에 걸쳐 세력과 영향력 확장을 위해 싸웠고 그 싸움의 주요 전장 중 하나가 분단 독일 및 분단 베를린이었다. 애초에 가시철망으로 둘러쳐있던 경계선이 차츰 넓이 15~150미터에 이르는 죽음의 띠를 형성한 콘크리트 벽으로 계획적으로 바뀌었다.

이 콘크리트 벽에는 감시탑, 전기신호 담장, 경비견, 차량통행방지 구조물 및 ‘사살권한’을 가진 무장순찰병들이 가득하게 되었다.

이 장벽은 적군의 외부공격으로부터 방어목적이 아니었다; 감시의 방향은 내부로 향해져 있었고,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부터 자국민의 탈출을 막기위한 용도였으며, 발로하는 투표행위(망명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장벽은 소비에트 제국내에서 행해지는 정치적 억압을 나타내는 세계적 상징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1989년 11월 9일 발생한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의 정치적 분단의 종식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동서냉전의 종말을 상징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보여준 이미지는 민주주의 및 개인적 자유의 상징이 되었고, 나아가 유혈사태 없이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15가지 부류의 기록물들은 베를린 장벽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기본적인 자료들이다.

11개의 시청각 기록물은 장벽의 시작과 끝, 장벽건설의 이유, 구간장벽의 추가건설, 그리고 마침내 장벽의 붕괴를 알렸던 1961년 월터 울브리히트와 1989년 귄터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에 관한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국경수비대 콘라드 슈만의 성공적 탈출사진(1961)과 탈출 도중 총격을 당해 장벽이 기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던 피터 페쳐라는 청년의 사진(1962)은 시대를 대표하는 사진이 되었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 및 1987년 레이건 대통령 등 2명의 미국대통령의 베를린 연설은 베를린 장벽에 관한 세계적 집단기억을 빚어냈다.

1990년 물리적인 베를린 장벽 구조물은 붕괴되었지만, 필름과 사진 속에서 세계인의 집단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전승국 4개국과 양쪽 독일 대표의 협상은 마지막 등재기록물이 된 1990년 2+4 조약의 타결을 이끌어냈으며 이로 인해 독일의 통일이 가능해졌고 나아가 유럽통합의 발판이 마련됐다.

영국 대헌장 1225년본

기록물 개요
대헌장은 1215년 러니미드에서 영국의 존 왕과 귀족들 사이에 맺어진 조약을 기록한 문서로 존 왕 통치기간동안 발생했던 여러 정치적 위기들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등재이유
대헌장은 영국역사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문건 중 하나이다. 이 대헌장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과세권, 영주권 및 사법권에서 왕의 권한을 제한했다.
아울러 왕이 행사해오던 불공정하고 임의적인 관습법적인 권한 또한 제한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핵심적으로 대헌장은 왕의 권한이 법위에서가 아닌 법 내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대원칙을 제시했다.대헌장은 이제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명사 및 아이콘이 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장기관
영국국립도서관, 영국 런던
링컨 성, 영국 링컨
솔즈베리 성단 사제단 회의실, 영국 솔즈베리
기록물 소개
대헌장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법안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 직접적인 기원을 찾다보면 영국보통법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나타난다.

존 왕의 형이자 사자의 용맹을 가지고 있었던 리차드 2세는 프랑스 내 영국 영토 일부를 잃고 한편으로는 노르망디의 아키텐과 영국영토를 유지할 엄청난 비용을 후계자에게 떠넘길 빌미를 만들었다. 존 왕은 1199년 즉위 이후 1204년까지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개인적 결점으로 인해 프랑스 내 영국 영토를 대부분 잃고 말았다. 이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일이 남은 재위기간동안의 제1의 목표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 돈이 필요했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왕권의 행사는 필수적이었다. 세금은 증가하였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의 특권과 관직 임명권이 매매되었다. 그의 정책들은 과중한 재정적, 사법적 부담을 수반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을 두고 6년동안 강력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와의 불화가 이어지는 동안 존 왕의 정치적 입지는 심하게 약화되어 교황은 존 왕을 파문시키고 잉글랜드 내에서 성무금지를 명하게 되었다. 존 왕의 인기는 끊임없이 하락했다. 이론적으로 왕이 파문된 땅에는 다른 크리스찬 지배자가 침략해 왕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존 왕은 1214년 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출정하기 불과 몇 주전에야 교황의 대주교 임명권에 동의하게 되었다.

존 왕은 군자금 마련과 교황과의 관계회복에서 성공했지만, 필리프 2세 프랑스 왕과의 부빈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한 뒤 그의 제후들과 함께 빈 손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노르망디를 잃고 돈을 더 끌어들이려 하자 저항은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존 왕은 마침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제후들의 반란에 직면하게 됐다. 존 왕은 할 수 없이 1215년 6월 윈저 인근 러니미드에서 반군과 협상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만날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존 왕이 부임을 반대했던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가 이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이 협정의 내용은 당초 구술로 이루어졌으나 왕실의 서기가 이를 기록했다. 이 협정문의 부본이 전국 각 지역으로 전해졌다.

1225년에 제작된 4부의 대헌장 부본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2부는 영국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이 중 1부는 1731년 화재로 심하게 훼손됐다; 그렇지만 이 훼손된 부본이 왕실의 봉인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부본이다. 링컨과 솔즈베리에 있는 부본들은 당시 이 곳으로 전해진 부본인 것으로 보인다.

대헌장은 왕권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대헌장의 목적은 왕의 자금조달 행태를 제한하고 왕의 사법권을 좀 더 형평성있게 만들며 지방의 왕실 공무원들의 권력남용을 막는 한편 개인의 권리를 임의적으로 유린하는 왕의 행태를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왕과 제후들간 갈등으로 최초에 정해졌던 대헌장의 취지는 실패했지만 장기간에 걸쳐 영국 법체계와 역사 및 사회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할 수 있다.

대헌장의 조항들을 깊이 되새겨보면 13세기 잉글랜드의 시대적 상황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대헌장은 찰스 1세 왕에 대항한 의회의 투쟁에서 주요하게 인용되었으며,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미국의 논리적 무기로 활용되어 미국헌법 및 권리장전의 기초가 되었다. 영국제국주의의 세계적 확장과 더불어 대헌장의 명성은 전 세계로 퍼져갔고 오늘날까지도 억압받고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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