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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영상

구술자

강해중, 곽형렬, 곽희성, 김결, 김광국, 김광호, 김랑호, 김영수, 김범태, 김병렬, 김복희, 김삼림, 김상집, 김성수, 김순곤,김신덕, 김연태, 김영택, 김정회, 김제언, 김진순, 김철부, 김태종, 김향득, 김효석, 김후식, 나경택, 박강배, 박규상, 박남규, 박남선, 박동기, 박몽구, 박미애, 박행삼, 심인식, 안성례, 양기남, 양인화, 오기철, 유복남, 윤광장, 윤점이, 윤청자, 이광호, 이남순, 이성길, 이성전, 이세영, 이순노, 이제의, 이행기, 이홍기, 이홍재, 이효순, 전춘심, 정영동, 정종만, 정향자, 정형동, 정현애, 조비오, 최동북, 천수남, 허연식, 홍란, 황종건

프롤로그 - 5월18일

18일 10시 20분 - 전남대 학생들 시내진출
18일 13:00 공수부대 시내 투입

자막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누려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사망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린다.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등장한 신군부세력은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다.
서슬퍼런 유신독재 치하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화산처럼 분출했고 이 "민주화의 불"은 1980년 5월까지 계속된다. 한편 권력 장악을 위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던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한다.
그리고, 공수특전단을 광주에 투입한다. 작전명령 " 화려한 휴가"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구술

1980년 5월17일 24시를 기하여 현 지역은 5월 18일 아침 7시에 딱 잠에서 깨어나니까 계엄령이 확대대고 휴교령이 내렸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군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약 7명의군인들이 저희 집에 들이닥쳤거든요. 셔터 문을 요란스럽게 누가 두들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인제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후배들이 찾아왔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남편이 그냥 맨발로 러닝셔츠바람으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무작정 들어와서 조별로 나눠가지고 화장실이며 마룻바닥이며 농이며 또는 다락이며 할 것 없이 샅샅이 이렇게 수색을 하고는.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이냐고 해서 쫒아가 봤더니 한사람이 권총으로 남편 얼굴에 대고 있더라고요. 저는 더 망연자실했죠. 그러면서 무슨 일이냐고 악을 써도 외쳐대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더라고요. 전번에 이제 학생들 모임에서 학교가 만약에 휴교령을 내리면 학교에서 모이자.또는 학교가 저지당하면 도청에서 모이자라는 일련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학교로 향했습니다. 학교 정문 앞에서 보니까 군인들이 공수부대가 총에 대검을 착검하고 앞에가 양쪽으로 5명 10명씩 쭉 있고 뒤에서 전차가 서있고. 당시 전대 정문 앞에 나와 있는 2~300명 학생들은 자 어떤 형태가 되었든 우리가 공부하는 캠퍼스이기 때문에 일단 학교로 들어가자.

당신들이 뭐냐 당신들이 먼저 학교에서 물러가라 이 학교는 우리학교다 이제 그런 것으로 변질이 되었죠. 그때는 구호도 외친다거나 그런 것도 없고 왜 당신들이 여기 와서 큰소리를 치느냐 하니까 거기서 한 2~30명이 모이니까 밀치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군인들이 막고 못 들어가게 교문을 그러니까는 그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밀어내!" 계엄군들은 해산하러오고 저희들은 골목으로 흩어지고 이러는 과정에 곤봉과 군화 발에 짓밟혀서 핏덩어리가 된 채로 끌러가는 학생 수가 늘어갔죠.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과정에 누구라 할 것 없이 자 우리는 결국은 저 계엄군과 싸울 필요가 있겠느냐 이러한 만행은 결국 우리가 시민들에게 알리자 가자 도청 앞으로. 구호소리가 막 나고 공용터미널쪽에서 막 소리가 들리고 시끄럽고 그러 길래 무슨 일인가 나가봤죠. 학생시위대가 굉장히 경렬하게 하여튼 막 악을 쓰며 구호도 별로 통일되어있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나오더라고요. 학생들에 대해서 최루탄을 경찰들은 쏘고 있고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맞서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열세해서 밀려가고 있었어요. 어느 순간 2시되니까 공수부대들이 딱 경찰들 대치해서 저희 앞에서 딱 서더라고요.

근데 이제 공수부대들은 말 그대로 민첩하게 생겼습니다. 군복에다가 M16들고 그러고 곤봉하나 긴 거들고 그 외에는 아무런 무장도 안했습니다. 시커먼 히 딱 서가지고 막으니까 감히 겁나서 누가 접근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세치를 한 20분정도 흘렸을 거예요. 이쪽에서는 시민 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고 물러가라 100여미터거리 감히 접근을 못하고 갑자기 군인들이 하나 둘 셋 명령을 내리더니 군인들이 엄청난 속도로 시위 군중을 곤봉을 휘두리며 달려드는 겁니다. 총을 뒤에다 가로로 매고 앞에는 곤봉을들고 뛰어 오는 겁니다. 골목으로 한참 들어오는 골목인데 학생하나가 쫓겨 들어오는 거예요. 이친구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서 한 50미터 들어가서 문을 열고 박차고 들어가서 아마 그 집에 숨었는데 위에서 보니까 내려다보이는 거예요. 잠시 후에 이제 두 명이 일인조로 계엄군이 달려서 따라 왔는데 그 집에 들어갔는데 그대로 신발도 신은채로 방까지 들어갔는데 막 들어갔는데 알 수 있죠 그니까 잡아 붙들어 매드만 그 자리에서 엄청나게 두드려 패는 겁니다. 그니까 그 자리에서 실신하다 시피 그니까 그집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가 왜그러나고 할머니가 뒤로 벌렁 뿌리치니까 뒤로 나자빠지고 이런 상황이 계속 벌어지니까 거기서 거의다 도망가는 소리 쫒아가며 악쓰고 쫒아가는 소리 어디 내다보도 못하고 담넘어서 내다보면 아무나 대고 계엄군들이 욕해버리고 어른이고 아이고 가족들도 없이 죽여븐다고 내다보지 말라고. 그당시 잡으면 그당시에는 머리가 상당히 길었을 거예요. 왼손으로 머리를 잡고 참나무봉으로 성문을 쳐요. 그러면 사람이 앞으로 꼬꾸라지죠.그러면 머리를. 계엄군이 이발하고 있는 남자를 쫒아와서 머리를 쳐서 왜 우리가 머리가 깨진것을 박이 터졌다고 표현을 하는지 제가 직감을 했거든요. 핏물이 온얼굴을 덮는것을 30초내에 봤거든요.치자마자 이건 진압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적군을 잡아 죽이고 족치는 그런 이상이였을 거예요. 인간이면 저렇게 할수 있을까.

여학생한사람을 공수부대들이 희롱을 하더라고요. 대검을 뽑아 들고 교복위 가슴결을 대검으로 푹푹찌르면서 희롱을 하니까 어떤할머니한분이 아이고 내새끼야 왜그러냐고 말리려하니까 그할머니를 공수부대가 워커발로 차가지고 땅바닥에 쓰러뜨린다음에 지근지근 밟는다고 그러죠. 그걸 보고있던 시민들은 저를 포함해서 돌을 던지면서 물러나라고 그랬죠.그러니까 공수부대원이 여학생 가슴을 대검으로 찔러버리더라구요. 그때 두분의 여자가 지나갔는데 한사람은 검은 투피스를 입고 한사람은 연분홍 한복을 입고 둘이 같이 나란히 가고 있는데 뒤에서 쫒아가는 군인이 가서 무조건 곤봉으로 쳐버리니까 팔이 오른손이죠. 내가 봤을 때 오른손이 뚝 부러져서 덜렁덜렁 하니까 그런 관경을 봤을 떄 다시 또 격분을 했던거예요. 사람을 떄리면 떄리고 말고 그런게 아니가 때리면 쓰러질거 아닙니까 발로 차고 그러면 쓰러져서 기절할정도되면 힘이 떨어지면 질질끌고 가는 겁니다. 끌고가서 옷을 벗기고 그래가지고 눕혀놨다가 짐짝같이 싣고 가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 사람이 불통안터지겠습니까. 아 그걸 보고있으니까 엄청난 공포감이 들어오는거죠.아저기서 여기서 내려갔다가는 붙잡혀서는 저렇게 당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고.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대요. 그렇게.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잔인무도하게 할수 있을까 하고. 인간이 저렇게 무서운 호랑으로 돌변할수 있을까 싶고. 어떤 부분에서는 제가 학교다니면서 제가 상무대다니면서 무용도 해주고 그랬다니까요. 근데 그게 너무 아깝고 내가 바보지 그런게 가서 왜 춤을 췄을까 내가 그런데가서 왜 김치를 담궈줬을까. 그리고 막 후회...도대체 전두환이놈은 어떤 놈인가...

일어서는 사람들 - 5월 19일 ~ 20일

19일 10:00 시민들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 19일~20일 계엄군의 만행으로 인한 목숨을 건 싸움
20일 18:35분 금남로 차량 시위
20일 21:40 광주MBC 전소

구술

그다음날 아침에 나와보니까 철도옆에 철조망이다 있고 조그만한 하수구가 있어요 덮게가 안되는 하수구 철망에가 피묻은 옷들이 걸쳐져 있고 육각 방망이가 그렇게 튼튼한 방망이가 부러진것도 있고 웅성웅성하고 계엄군들이 와서 그렇게 하는 이유를 모르니까 명괘하니 누가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고 굉장히 산만했었죠 저 양반 퇴임한사람 잡아죽이지 왜 데모는 한단가? 월요일날 학교를 갔습니다. 학교에 가니까 벌써 선생님도 마찬가지지만 학생들도 분위기가 달라요. 완전히 분위기가 공부할 분위기도 아니고 시민들은 다죽어가고 젊은 놈은 다죽여간디 우리가 공부만 하고 있어야하한가 그런 불평한 학생들. 우리가 지금 이런상황에서 공부가 되겠느냐 이제 앞으로 우리가 이런일에는 적극적으로 대학생형들과 동참을 해야된다. 꼭 공수부대들이 알고 대동고등학교 진압한다고 한트로 센터 앞에 있던 계엄군들이 대동고등학교 앞으로 진격을 해 온것이었죠. 얘들이 내려갈려고 해요. 튀어나가가지고 그 앞에 팔을 쭥 벌리고 서있었어요 너희들 지금 나가면 개죽인데 너희들 나갈수 없다. 그러니까 정 가고 싶은사람은 나를 밟고 가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부정부리를 보면 좌시하지말고 일어나라고 평소에 저희들에게 가르쳤는데 왜 막냐고 항의성 얘기도 하고 여러가지 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러지만은 내보낼수는 없었으니까. 그떄 상황에서는 나가며는 바로 죽을 것같았으니까. 그래가지고 담임선생님 말씀에 그대로 순응해서 얘들이 피한모습을 보고 앉았는 너무 허전하기도 하고 가슴이 뛰고 불안해브러요. 앉아있을수 없었습니다.그래서 나갔던 것이죠.

사람들이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죠. 그가운데 처음에는 한 3~400명이렇게 앉아있었는데 점차 숫자가 많아지고 거기에 보니까 과거에는 전혀 볼수 없었던 할머니들도 있고 할아버지들도 있고 아가씨도 있고 학생들 꼬마들도 할머니들이 데리고 와서 같이 손잡고 같이 앉아있는 거예요. 그냥 노래부르고 구호외치고 그렇게 하다가 돌맹이 주워 던지고 이렇게 했는데 너무나 잔혹하게 나오니까 저희 서점에 모여든 그 후배들 학생들 한테서도 우리들도 송곳이라도 가지고 나가자 옷핀이라도 가지고 나가자. 덤프트럭이 모래나 자갈을 실고 다녔거든요 그런차들이 가다가 누가 시켰는것도 아니고 학생들이 시켰는지도 모르죠 자갈좀 내려주라고 자갈한참 퍼준게 아니라 적장 조금 뭐 덤프트럭 이나까 내리고 주루룩 가요 가면 많이 쏟아지잖아요. 그걸가지고 던지고 또 기사들이 문 열어놓고 있다가 도망치면 급하잖아요 급하면 차타요 1~200미터 가면 안잡히 잖아요. 상황이 주어진대로 했거든요 그상황에 맞춰서 돌을 던져야할 상황이면 돌을 던지고 악을 써야될 상황이면 악을 쓰고 도망가야될 상황이면 도망을 가고 그렇기 떄문에 목적은 저들은 쫒아야된다. 목적은 하나 있었어요. 군인들을 어떻게 하든지 하여튼 광주 시내에서 더러운 피 묻히지 않고 저 군인들을 내몰 내야 한다. 어떻게서 든지 광주에서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는 이 군인들을 내보내고 싶었어요. 다른 소망은 없었어요.

그때까지만해도 시민들은 완전히 위축이 되가지고 항의도 해봐야 되지도 않고 돌맹이도 안되고 욕으로도 안되고 힘으로도 안되고 절망의 상태였죠. 절망의 상태였는데 진짜 큰힘이 되는 것은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며 들어가 준것. 저 유동 사거리에서 그니까 금남로 끝쪽이죠 도청맞은편 끝쪽인데 차량들이 시내버스 ,택시들 수백대가 불을 켜고 쌍라이트를 켜고 빵빵빵빵하고 계속하는 거예요. 계엄군차인줄 알았죠 그게 계엄군차가 아니고 버스고 택시고 환호가 터지고 난리 났죠 그러니까 이건 뭔 그떄 그자리에 있어 봤던 사람들은 눈물이 줄줄 나는 거예요. 우리는 도저히 저 계엄군을 이길수 없다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생각지도 않던 운전기사들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시내버스 앞에 서고 그다음에 자동차 화물트럭 뒤에 서고 막 박수를 치고 열광을하고 목이 쉬었는데도 전혀 힘들지도 모르고 사람이 에너지들이 전혀 자기도 못느끼는 에너지들이 나오는 거죠. 그 주택가에서 많은 함성이 들리더라구요 그때이제 9시 뉴스가 한 10분정도 진행되었던 순간인데 밖에 이러이러한 소리가 들리는데 무슨일이냐 그랬더니 광주에서는 폭도들이 날뛰고 있고 시민들은 하나 전혀 다친사람이 없으며 군인들만 많이 다쳤다. 계엄군쪽에서 정부쪽에서 이야기하드만 계속 그런으로 보도하니까 방송 느그는 아니다 우리 시민들은 전부 맞아 죽고 그러는데 느그는 뭐하냐 느그는 차라리 그게 낫다 해서 불을 지른거예요 mbc에다가. 사람들이 모여서 야 mbc불질러 mbc불질러 이러니까 산타가 오르라지는거 합판도 갖다놓고 신문지도 갖다놓고 불을 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후다닥 내려오고 광주시내가 불길이 솟고 그날가치로 광주시내가 소란한 날은 없었을 거예요.

총, 야만에 맞서다 - 5월 21일

21일 05:30, 광주역에서 시체 두 구 발견
21일 09:00 도청앞 계엄군과 대치
21일 09:50 시민대표 도지사와 계엄군 철수 요구 협상시도
21일 12:55 도청앞 무차별 집단 발포
21일 13:00 계엄군 집단 발포 후 시민들 자위를 위한 무장 시작
21일 17:00 시민군 지역방위대 편성, 외곽순찰 및 지역방위 시작

구술

새벽녁에 되서 시내부근에 우리가 당도했을때 그떄당시에는 지금은 없어졌습니다마는 분수대 주변에 시신 두구가 피를 흘린채 발견되었었요. 금남로 쪽에오니까는 손수레 리어카에 시신 두구를 실고 태극기를 딱 덮어가지고 밀고 들어오는데 시신을 그떄 처음봤잖아요.죽였다 죽었다 했어요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 이잖아요. 정말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피가 거꾸고 솟대요. 이제는 한번 붙어보자. 그 시신을 본 많은 시민들이 도청으로 운짐하기 시작했어요. 적어요 9시경에는 몇만은 넘었으니까 그리고 그 분수대 주변으로 이미 그 계엄군들은 포진하고 시위대가 더이상 도청으로 접근할수 없도록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심지어 뒤쪽에서 우리가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지사를 만나서 협상도 좀하자 라는 목소리가 몇마디 나왔다고 그니까 앞에서 그렇시다 그래서 거기서 몇가지 적었다고. 받아줄건 받아주고 내가 못할게 있고 그러니까 지사보고 시위대앞에 와서 발표해 주라고 했다고. 지사나왔어요. 그런데 스피커가 잘안되서 못나왔다고. 지사가 안나타난 상황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간격이 좁혀 가고 있었어요.좁혀져 가요. 조금씩조금씩 이사람들이 군인들이 뒤로 밀려난 상황이고 계속 이렇게 요만큼 왔다가 다시 군인들이 다시 오고 사실 반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마 도청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던 겁니다. 1시되니까 갑지가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거예요. 옥상에 있는 스피커에서. 곡만 나오지 가사가 나오진 않고 딱 순간적으로 가사가 울려퍼지는 거예요 가사가 나오면서 총소리가 막 나옵니다. 설마설마 했죠 그래도 우리한테 총이야 쏠라디. 이런 설마하는 감정 있는데 금남로 양쪽에 사람들 많이 있었어요. 근데 사람들이 막 도망가더라구요. 총소리 나면서 설마설마 하다가 아차 하면서 쏘는 것 같다고 돌려서 돌리는 순간에 맞았어요 그 탄력으로 짐칸으로 뒤로 떨어졌죠. 시민들이 삭 흩어지니까 장갑차에서 서 이제 탄 박스를 내려줘요 그러면서 중대장이였을 건데 이름은 기억 못하는 건데 야이 개새끼들아 조준사격안해! 계림시장 이쪽 뒤편에 오니까 엄마들이 물 타월에다 물을 뭍혀서 딱 걸어주면서 딸기 있잖아요 딸기를 따다 콜라른 주면서 딸기를 주면서 저는 지금도 딸기를 안먹어요. 그 딸기를 입에 넣는 순간에 뭐를 빵 쐈는데 나 차운전해주는 기사가 그자리에서 즉사한 거예요. 그러면서 동시에 금남로에서 사람들이 확 흩어지고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여지고 그랬었는데 그렇게 한 1~20분 그렇게 숨어있다가 이제 정말로 우리가 이길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이런 생각하게 된거죠. 그런데 놀라운게 다시 광주 시민들이 그 금남로 가톨릭센터에 나오는거예요. 나와서 노래를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막 쏘고 소리지르니까 안쏘는 거죠 주위에 시체도 있고 부상자도 있고 끌어 내더라고 그런데 똑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는 거야. 쓰러지면 순간 싹 흩어져요.순간 흩어졌다가 그 언젠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니까 큰 고래라던가 보니까 떼지어 다니는 물고기들이 싹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는 그런 모습이 보이드만요. 그래서 한명이 쓰지면 싹 흩어졌다가 사람들이 모여서 그 시신을 끌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뒤로 웅성웅성다시 모여요. 그러다 다시 빵 갈기면 흩어 지고. 그떄 그 마음속에 좌절감에서 다시 금남로로 나오고 나도 금남로로 나오고 같이 노래부르고 그때 이루 말할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나오기도 하고 분노감 저들을 죽여야한다.

그 도청앞에서 총소리를 듣고 난 뒤로부터 사람들이 내눈으로 봐서도 저것을 이상하다 할정도로 사람들이 엄청난 감정적으로 고조가 되어있었고 말 그대로 트럭을 탄다거나 버스를 탄다거나 그러면 몽둥이 내놓고 때리고 이러고 이다가는 우리도 죽는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무기를 들자. 총총총총 이제 저놈들이 총을 쏘면 우리고 총을 쏴야겠다. 총을 받아야겠다. 총을 들고 싸워야겠다. 우리도 무기를 들자 이렇게 있다가는 다죽는다. 총을 실고 광주를 이렇게 들어왔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총은 칼빈 ar5 m1 구식무기죠. 무기를 가지고 광주를 들고 왔는데 저희 일행들 뿐만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광주 인근 곳곳에서 총들을 가져왔더라구요. 공원에서 총들을 나눠줬어요. 태워갔고 온 가져온것을 가져왔어요.나는 누구하고 나눠줬는지도 몰라요. 총도 한번도 쏘보지도 않고 사용도 안해본 놈이 군대갔다온 사람한테 단 30분 배워서 총을 나눠주고 쓰는 방법을 다 알려줬어요. 근디 그총을 받을라고 줄서고 대기하고 있는거예요.제 차례가 와서 나를 보고 머리가 짧으니까 이 째깐한 놈이 총을 쏠려고 하냐 아나 교련교육도 받았기 때문에 총을 쏠수 있다 진짜 쏠수 있냐 아나 진짜 쏠수 있다. 그때 받은 소총으 m1소총인데 탁 받으니까 너무 무거운 거예요. 다시 트럭에 있는 청년한테 아저씨아저씨 이거 너무 무거워요. 하니까 권총을 주더라고. 권총을 그때는 지휘체계가 있던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리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군대를 갔다온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대응방법을 논의 하고 저들을 어떻게 광주에서 몰아낼수 있을 까 이런것들을 원래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거죠. 저녁에는 우리동네를 지켜야될거 아니냐 21일부터 우리도 무기를 휴대를 하고 지역 배치를 시키고 저는 4개조를 왔다갔다하면서 서로 격려도 하면서 무섭기도 하면서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하죠 거기에 몰두하고 무섭기보다고 어떻게 안전을 지켜야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해방, 하나가 되다 - 5월 22일 ~ 26일

22일 새벽, 시민군 도청 접수
22~26일 시민군 상황실 도청에 개설되고 광장에서는 범시민 궐기대회가 지속적으로 진행

구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모님하고 같이 갔습니다.계림동으로 이상하다 왜이렇게 조용하데? 마침 트럭이 지나가서 왜이렇게 조용하데 그청년이 계엄군들 후퇴했습니다. 도청 비었다는 거예요. 현재 저희들이 들어가고 나니까 시민들이 여기저기 많은 시민들이 나와서 환호성을 울렸죠 야 우리가 이겼다. 저 잔인한 공수부대를 우리가 몰아냈다. 아니 뭐 내 생에 그렇게 기쁜날은 없었죠. 아직까지는 모르겠어요. 아들태어놨어도 그렇게 안기쁘더라구요. 그때부터 질서가 잡혀가는거예요. 이제 고등학생들 완장을 차고 질서유지질서유지를 함성을 지르면 사람들이 다 따라주고 그떄 금남로쪽 상가들 다 문을 열고 사람들이 활기차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갔죠.

아주 분위기랑 무지 평화롭고요 우리가가면 박수치고 아줌마들이나 대인동아줌마들이나 서로 고생한다고 물같은것도 바가지로 퍼주고 먹고 활동해야 한다고. 동네 아줌마들 길가에 솥단지 걸어놓고 불떼놓고 어떻게 차려줄수 없으니까 주먹밥만 소금만 쳐서 차제 실려주고 나눠주고. 어머니들이 나눠주는데 금방먹고 왔습니다. 아쉬워하는 그런 분위기였죠 더 주고싶어하는 주는데 우리가 안받잖아요 그 어머니들 마음에서는 더 묵고 해야제 하면서 더 안타깝게 말씀하시고 아까운게 없었어. 그때 아까운거없이 있으면 다 주고 싶었어. 시위 차랑 다니면 고생한다고 밥올려주고 박수 쳐주고 올라와서 손잡아주고 근디 시위 났다는 것보다 마음이 뿌듯해요 이세상에 태어나서 국민을 위해서 광주 시민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있는가보다 근꼐 내가 진짜 장한일을 하고 있구나 마음이 뿌듯한것이여. 이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것이 군인들 상대로 하는것이 잘한일인가 내가 해도 되는 것인가 약간 꺼리는 마음 마음속에 하나 있었는데 아주머니들이나 어른들이 자발적으로 가져다 주고 그런모습을 보면서 그런마음이 사라졌죠. 아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나쁜일은 아니구나.하는 정확히 뭔지 몰라도. 신나죠 엄청 신이 났었죠 우리가 무슨 국가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있다는 뿌듯한 느낌이 대단했었죠. 정신없이 한거죠 만약에 그런 새로운 몸에서 느껴지는 그런것들이 없었으면 일한다는 것이 어렵죠. 저희들이 가니까 그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그리고 무장한 시민들이 속속들어오고 있었죠 왜 도청은 하나의 상징이었으니까요.

또 사실 그 해방감이 만취되서 시민궐기하고 정말로 말그대로 엄청난 분위기 였습니다. 눈물을 흘렸으니까요. 그 뭐라합니까 애국가를 부를 떄는 가슴을 꽉 벅차오른다고 합니까 목에 뭣이 맷히잖아요. 눈물이 날려고 하고. 눈물도 나려고 하고 모든사람들이 다같이 하잖아요. 똑같이 애국가부르고 그렇게 보면 좀 벅차더라구요. 정말 다들 울고 그랬죠 저도 많이 울고. 정말 평상시 부를 떄 느낌하고 다르죠 자기 감정들이 들어가면서 그말 한마디한마디가 굉장히 절실하게 느껴지고 의미가 다시 생각이 들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 무슨말을 외치고 같이 호응해주고 전체가 분수대에 많은 사람들있을때 그사람들이랑 시민전체가 하나가 된느낌 그니까 저는 하나가 된다. 하나된다라는게 듣기에는 하나된다는것을 실감을 못했어요. 근데 바로 이게 하나되는 것이구나. 그 젋은 여성들이 와서 자기들이 도울게 뭣이 있겠냐고 자기들이 자청해서 왔는데 특별히 도울일이 없으니까 나중에는 부상당해서 굉장히 고통당한 부상자를 위해서 간병을 자청하고 소변이라 대변 수발 다하고 음식도 내리기도 하고 병원에 문이 정말 이어지게 나도 헌혈을 하겠다. 모여드는 거예요 내가 봐도 노인이고 병약한 사람들은 안되겠어서 들어가셔야겠다고 하니까 무슨소리냐 내가 피라도 빼서 부상자들을 치료해줘야지 내가 광주 시민이고 일륜도덕에 맞는 행위지 엄마가 그랬데 엄마가 다들 저렇게 하는데 너도 나가서 뭔가 할일이 있나 보고 와라 궁금하니까 밖에 소식도 알아보고 너도 뭔가 할일이 있나 보고와라 엄마가 그래서 왔다고 했다고 하더라구요. 언니는 왜왔어요. 뭐가 해야할거같아서 와서 하고있다. 자연스럽게 일어난 누가넌 뭘해라 누가 넌 뭘해라 지정해서 시키는 게아니고 그 상황에서 보고 내가 광주시민을 위해서 할수 있는 일이 무었이가 해야될일이 무엇인가를 느끼면 그대로 행동으로 했습니다. 전 공수부대원한테 맞아죽은 총에 의해 죽은 시신들 수습해야될거 아닙니까 근데 누가 누구에세 지시를 하거나 부탁을 한 사실도 없는데 어디선가 관이 오고 어디선가 태극기가 오고 그다음에 누군가 돌아가신 분들의염을 하고 입관을 하고 이런것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 진겁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배려를 이렇게 까지 이렇게 깊고 느끼게 할수 있겠구나 우리모두 공유하게 된겁니다. 또 무엇을 사람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여지는 것같았어요. 그일에는 내가 왜 이렇게 해야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돌아다녀야하는지 내가 왜 밤에 이 창고같은 강당에서 등붙이고 있는지를 목적이 없어졌으니까 내가 의식을 못해요 내가 있는지를 시간가는지도 그리고 좌절감 속에서.

광주, 갇히다. - 5월 22일 ~ 26일

25일 14:00 미국항공모함 부산 도착 속보 발표

구술

제가 YWCA에서 대자보를 쓸때 대자보 초안을 선배분들이 줍니다. 그걸 따라서 배껴서 쓰는데 어느 한분이 야 인제 이 전두환 이 경들이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것에 대해서 미국이 부산항에 함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것을 견제하기로 했다. 우리의 승리는 눈앞에 있다.아 그러면서 좋아가지고 그 내용을 빨리 속보로 해가지고 그것을 썻습니다. 그래 전두환이 너는 죽었다.미국 함대가 들어왔다.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고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인데 우리를 이대로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미군이 들어올것이다. 그때까지 미국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죠. 미국이 가만 있진않을 것이다. 자국민을 학살한 군사정권을 미국이 도와줄수 없다. 전부사람들은 그때당시에는 전두환이 이제 이거 견딜수 없게 물러날것이다. 그런줄만알았어요.

그런데 방송을 들어보면 방송에서는 전혀 안나오고 외곽으로 가는 전화선 다끊어져 있지 또 중앙방송에서는 폭도라고 계속 매도를 하지 방송조차도 안되요. 아예 안나오니까요 광주에서 그렇게 해도 해방을 맞았도 알려지지 않은 겁니다. 계엄군들 다 헌병대 계엄군들 지키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는 개미새끼 한마리도 나갈수 없다고 했었어요.그러고 있다가 도청앞으로 왔는데 우리 오빠가 하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나한테 죽지만 마라 우리 오빠가 너 죽지만 마라 그나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지금 서울을 가려고 해도 빠져 나갈수 없다고 했어요. 광주에서 나 갖혀 버렸어요. 시위하는게 갖혀 벼렸어요. 아예 외곽으로 알려야겠다는 생각때문에 나갈라다가 못나가고 다시 나는 광주로 돌아 왔는데 그때 미니 버스 탄사람들 막 다시 돌아왔는데 그 나머지 사람들이 거기 통과 못했으니까요. 이것이 광주에서만 하지 않을 것이다.서울에서 할걸로 생각했거든요 딴 지역도 이렇게 될것이다.

방송은 그래도 지금 광주만은 아닐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우기가 계속 버티고 계속 하다 보면은 서울에서도 할것이다 다른곳에서도 할것이다. 우리와 마음이 같을 것아니냐 그리 생각이 들어가지고 기대도 많이 가졌습니다.솔직히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기를. 전남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우리를 관심깊게 지켜보고 지원해줄거다 뭐 이런것들이 있었었죠. 그러니까 일말의 뭐 기대감 희망 공포 이런것들이 수시로 변화 하고 교차하고 그랬었죠. 3일날 4일날 5일날 지나면서 부터 진작에 그런얘기는 안나오고 언제 들어 박힐지 모르지않느냐 서로 격려를 하면서 위로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죠. 날짜가 갈수록 긴박한 상황이 됬었죠. 트럭타고 나가갔고 공수부대 잡자. 아무대서 죽고 쓰러지고 총맞아 죽었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헬기는 인제는 공중에 높아 보이지 않아요.헬기소리만 들리지 유인물 해산하라 폭도들은 해산하라 곧 군인들 진압에 나선다. 당신들이 이렇게 까지 저항하게되면 당신들에게 남겨진건 죽음 뿐이다.그런 유인물이 계속 뿌려집니다.

마지막 새벽 - 5월 26일 ~ 27일

26일 07:20, 계엄군 무력진압 최후통첩
27일 04:30, 계엄군 도청 진입

구술

계엄당국에서 80년 5월 26일 12시까지 도청까지 비우고 떠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진압을 하겠다. 그래서 그내용은 도청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 알렸습니다. 이렇게 계엄군이 무력진압을 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해왔기 때문에 집에 갈사람들은 가거라 그리고 끝까지 계엄군하고 계엄군에 저항할사람은 남아도 좋다. 도청을 비우고 우리 해산하자 이창경의 이야기이고 아무런 보장도 없이 이대로 갈순 없다 우리는 여기서 죽겠다. 그당시에 들어간 사람들은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들어가라고 그랬으니까 살고자하면 들어가죠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여기 남아있으면 우리가 여기 무덤이 될거니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원망스럽다 이런것들은 별로 없었어요. 기왕에 나는 죽겠다라고 생각했고 또 그사람들은 살겠다고 생각한 사람이고 죽으면 광주시민 다죽는게 아니고 소수만 죽잖아요. 언저녁에 그 있는 사람만 죽이느까 당신들이라도 살아서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 해주겠지 그때는 그랬지 십년이 갈지 백년이 갈지 모르지만은 언젠가는 이야기가 나오겠지 그렇게 생각했죠. 거기 당시에 있었던 대다수는 어떤 힘보다는 무너진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습니다.안된다는것을 알아요. 당한다는 것을 .

그러니까 저희들한테 나가라고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나왔고 또 사실 시민군들 중에서도 고등학생 이런사람들은 총 놓고 나가라 우리 광주는 우리 같은 사람이 지킬란다 또 젊은 사람들이나 연약한 사람들은 이미 여고생들같은 경우는 자원봉사해서 밥해준다는 사람들 다 나가라 했습니다. 들어간 친구들도 있고 실제로도 많이 남았어요. 많이 남아가지고 가라고 해도 다시 도청으로 들어가는 친구 있고 도청서 가라고 하면 와이로 오는 친구도 있고. 그 많은 사람들이 죽었잖아요. 근디 갈수가 없잖아요. 가면 배신자죠. 그사람들 죽게끔 죽어가는 것을 지켜주지 못했으면은 같이 죽어야죠. 그러면 우리가 거기서 몇몇사람들은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죽으면 씻겨주는 사람도 없을껀데 목욕이나 하자 죽음을 맞이하자 그러고 목욕하고 속옷다 갈아입고 그리고 차분하니 거기사 맞이하고 있었어요. 왜 저라고 두렵지 않겠습니까. 두렵고 진압군이 들어온다고 했을떄는 내가 이대로 죽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었고. 그리고 밥을 다 먹고 난 연휴에 그 ywca안에 강당에 이 철제 의자입니다.철제의자를 전부 모아가지고 현관에다 바리게이트를 쳤습니다.산더미같이 바리게이트를 쳤어요. 그리고 하도 졸리기에 ywca 조그만 식당방 하나 있었습니다. 그 식당방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전부 칼잠을 이렇게 자고 있어요. 저도 틈바구니에 자려고 있으니까. 저희들도 지칠대로 지친것이 벌써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가니까 제대로 못먹고 지친께 설마 올라디 설마 그러고 자븐거죠 잠자고 있을 때.

참 이상하죠. 어떻게 보면. 죽음의 현장이 도처에 널려있는데 피곤이 몰려와서 잠을 잤던거죠. 총을 옆에다 품고 칼잠을 눈을 붙였을까 말까 하는 순간에 사이렌이 울리면서 "광주시민여러분 계엄군이 쳐들어오고있습니다. 도청으로 모이십시오"; 그 갸냘프게 어둠을 뚫고 흘러오는 "시민여러분 우리 다 죽습니다. 고훈수 부대가 오늘밤 도청을 함락합니다. 도와주십시오." 그 사이렌 소리를 들은 사람 마다 전부 가슴이 찢어졌을 것입니다. 기절할정도로 가슴이 찢어질라 하더라고. 그 음성소리가 여자소리인디 그 폭탄소리에 그 방송을 하고 갈때 '너는 영웅이다, 어떻게든 죽지말고 살아라'이런 생각을 했당께 섬광이 번뜩번뜩 하고 시댁이니까 밤이니까 탱크가 굴러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창틈으로 보니까 소대별로 산으로 올라가서 12시 거의 대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공포탄일것이다. 계엄군이 하얀띠를 두르고 들어오는데 외곽에서는 총소리가 들리고 거의다 들어 왔구나 했는데 담을 타고 딱 도는데 총이 이렇게 딱 나오더라고요. 총이 나오는데 머리가 보여야 쏴버리는데 손만 나와서 쏴버리더라고 군들이 다 들어왔더라고요. m16소총 자동상태로 계속 발사하면서 얼마나 총소리가 나던지 그시간이 바로 계엄군이 광주시 전체와 도청과 사직공원을 무력정복을 하는 총소리가 고막을 울렸습니다. 따다다다다다다

아 이제 진짜 죽는다고 다들 이랬는데 아까 좀전에 잡히기 전에 왔다갔다 하고 새벽에 밀려들어온 그 공포는 그때 인생의 최고의 공포를 느겼습니다. 그 순간부터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공포의 순간은 제압되고 느껴보니 그동안 있었던 날보다도 더 길었다. 시간이 빨리가서 날이 밝았으면 좋겠더라고요 밝으면 시민들이 몰려들것이다. 그러면 계엄군들이 진입을 못할것이다 하는 기대감. 아마 제 생에서 그 몇시간의 밤이 제일 길었던것 같아요. 전투가 시작되어서 전투를 하면서도 날이 밝기를 바랬으니까요.

1980년 5월 27일 새벽 6시 30분
도청을 피로 물들이며 진입한 계엄군에 의해 10일간의 광주항쟁을 막을 내린다.
그러나 광주 민중의 저항은 이후,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적 저항의 위대한 동력으로 거듭난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으로,
그 뜨거웠던 인간애의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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