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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시민의 함성

1980년 5월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

신군부는 5월 17일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을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도중에 연행하였고,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 하면서 국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대학,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 등에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계엄사령부는 정치활동 중지를 공포하고 대학에 휴교령를 내렸으며,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등의 "포고령 10호"를 발령했다.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는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요구를 저버리고, 재야 정치인과 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시위의 중심세력으로 여겨 탄압한 불법 행위였다.

1980년 5월 계엄군 투입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 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군대를 투입하였고, 서울에는 1, 3, 5, 9, 11, 13 공수여단이,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투입되어 민주화운동 세력을 제압해 버렸다.

1980년 5월 전남대 정문 앞 시위

5월 18일 10시 무렵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잔혹한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들에게 폭언과 구타를 가하기까지 했다.
민주화의열망

1980년 5월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내로 쏟아져 나와 스크럼을 짜며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이러한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무차별적 폭력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1980년 5월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고,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잔인함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하였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도심곳곳에서는 시민과 계엄군의 격렬한 대치와 충돌이 일어났다.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결국 발포하기에 이른다.

고등학생 김영찬 군은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전날 계엄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던 청각장애인 김경철은 19일에 사망했다.

오후가 되자 도심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늦은 저녁 금남로에는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가 출현했다. 계엄군과 경찰은 최루탄과 가스로 이를 저지하고, 탑승자를 공격했지만 시민들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노동청과 세무서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을 규탄했으며,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광주 MBC방송국 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학살, 계엄군의 집단 발포

20일 계엄군은 광주와 외부를 연결하는 전화를 차단하고 광주시민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도심 여기저기 화재로 말미암은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고, 광주역에서 발견된 시체 2구가 리어카에 실려 금남로에 나타났고 광주시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이 주둔한 전남도청을 찾아 거세게 항의했지만 위정자와 군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시민들은 군의 저지선을 넘었고, 계엄군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다. 저격수는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했고, 총탄에 맞은 시민은 차례로 금남로에 쓰러졌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신을 대열에서 끌어내고 부상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는 시민에게도 향했다.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부상자가 늘어나자 병원 앞에는 주부, 아주머니, 젊은 여성들이 헌혈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1980년 5월 시민군과 광주 공동체

시민은 계엄군의 총격에 분노하여 자위를 위해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총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시민들은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기도 했다. 무장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시민군’이라고 불렸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공방 속에서 계엄군은 전략적으로 퇴각하였고,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하며 승리감을 만끽하였다. 시민들은 길거리에 흩어져 있던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청소하였고, 흩어져 있던 시민군을 모아 재편성하여 치안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시내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광주를 봉쇄하고 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하였다. 그들은 시 외각을 근거지로 매복하여 시민들에게 사격을 가했고, 많은 희생자을 발생시켰다.

1980년 5월 광주 공동체

계엄군을 몰아내고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사수한 5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7일 동안, 광주에서는 시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으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원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과 시내의 자치활동을 해 나갔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상인들은 주변 길가에서 솥을 걸고 밥을 지어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전남도청 분수대에서는 매일 ‘시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궐기대회에서는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와 투사회보 등의 유인물이 배포되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지혜를 모았다. 사람들은 주먹밥과 빵 등을 대가 없이 나눴고, 부상자를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등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천했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희생자의 시신을 담은 관들을 가지런히 놓아두고, 입관하지 못한 시신들은 무명천을 덮어 두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마련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 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다 함께 슬퍼하였다.

신군부는 타 지역에 광주가 ‘치안 부재 상태’라고 조작 보도하게 하여, 광주시민의 민주화 요구와 묵살하고 계엄군의 살인적 진압을 은폐시켰다.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과의 협상과정에서 내부 의견에 혼선을 갖기도 하였고, 계엄사 정보요원의 교란작전으로 인해, 협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1980년 5월 최후 항쟁

계엄군과의 긴장이 계속되던 5월 26일 새벽,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은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에 맨몸으로 나서 탱크의 진입을 저지하며,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의 특공대가 투입되고 만다.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도청을 떠나기 시작했지만, 많은 시민들이 도청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10일간의 항쟁 동안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은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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